폰그림

반말 2012. 9. 3. 14:20

작년 9월 말 핸드폰을 스마트폰(갤S2)으로 바꾸고 나서, 이걸 어떻게 하면 좀 잘 써볼까 싶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.

적어도 남들처럼 게임기나 동영상 플레이어로만 쓰기엔 매달 내는 수만원의 요금이 너무 아까워서이기도 했고,

podcast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이 넓은 스크린으로 뭔가 하고싶기도 했다.


당시 구글 마켓 (현 Google Play)에서 일주일이었나? 일정 기간동안 앱 몇 개를 골라 10센트라는 말도 안되는 가격에 파는 행사를 했었는데,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는 도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.



AutoCAD로 유명한 Autodesk사에서 만든 Sketchbook mobile (http://goo.gl/xVwiv).


처음들어보는 회사라면 좀 망설였을지도 모르겠으나, 워낙 좋아하는 회사라 자세히 알아보지도 않고 결제를 했다.


설치하고 보니 브러쉬 종류와 굵기, 투명도, 색을 적절히 고른 뒤 터치를 해서 그림을 그리는 앱.

끄적끄적 하는게 재밌기는 했지만 손가락이라고 하는 기기(!)의 특성 탓도 있고 

(내가 어디 점을 찍는지 손가락에 가려 보이지가 않는다!)

막상 뭔가를 그릴려니 뭘 그릴지도 잘 모르겠고 해서 한동안 묵혀뒀었다.


그러다 처형댁에 놀러갔다가 다섯살짜리 조카를 데리고 뭘 할지 모르겠어서 그림을 그렸는데,

당시 그린 그림들을 보면 참 조잡하다.


[2012년 1월 24일. 고래아가씨]

- 채색따위 없다. 윤곽선으로만 그렸을 뿐.


[2012년 1월 24일. 나무와 새]

- 일단 나무를 내가 그리고 옆에 새를 어떻게 그릴지 조카에게 물어봤다.

- 조카가 그리라는 곳에 그리라는 색으로 그렸는데 그리고보니 진보신당 마크 비스무리;


손가락으로 끄적이면서 어쨌거나 작품(?) 몇 개를 완성하다보니 사용법이 좀 익숙해졌고,

추웠던 2월, 퇴근하고 자정 가까이 집에 들어가는 길이 왠지 적적해서 그림을 그려봤다.



[2012년 2월 3일. 집에 가는 길]

- 2호선 전철이 신림역에서 신대방역으로,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길 바깥 풍경을 보면서 그린 그림.

- 그림을 그리겠다는 목적보다는 기분풀이, 심심풀이로 그린 그림이라 사실 정성을 들였다고는 말하기 힘든데, 페북에 무심코 올렸더니 호응이 좋았다.  


재미가 붙어 폰그림 연습이라는 걸 시작해봤고



[2012년 2월 6일. 겨울산]

- 친구가 스위스 여행갔다가 찍은 융프라우를 떠올리면서 그렸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림.

- 이런저런 브러쉬를 써보는 것 자체가 주 목적이었다.

- 아내를 신도림역에서 기다리면서 그렸는데, 흔들리지 않는 곳에서 제법 오래(?) 있던지라 이것저것 많이 해봤다.


[2012년 2월 9일. 알]

- 명암 연습을 해보겠다고 그린 그림.

- 원래 그리려던 건 알이 아니라 앵그리버드 중 터치하면 알을 투하하는 하얀 새였다.

- 그리다 보니 알 자체로 괜찮은 것 같아 아예 둥지까지 그리고 제목도 알이라고 붙였다.


적절히 확대/축소를 하면서 세부를 그리고, 레이어를 이용해서 그림을 겹쳐그리는 법이 손에 조금씩 익어가면서 손가락으로 그리는 그림 치고는 제법 정교한, 마음에 드는 그림도 나오기 시작했다.



[2012년 2월 28일. 앵그리버드]

- 앵그리버드는 당대 최고의 인기게임이기도 했고, 디자인도 할만 하다 싶어 꼭 그려보고 싶었다.

- 막상 손을 대보니 생각보다 복잡해서 한차례 포기도 했었지만, 다시 도전해서 그려낸 그림.

- 저 눈을 그리는데 레이어가 4개던가, 저 부리를 그리는데 레이어가 6개던가 동원되었다.


[2012년 3월 6일. 부활절 토끼 인형]

- 이건 전철에서 그리지 않고, 집에 와서 내 책상에 앉아 그렸다.

- 쇤브룬 부활절 장터에서 사온 토끼인형을 보고 그린 그림.


폰그림 시작 한달만에 나온 결과물치고는 맘에 드는데, 문제는 여전한 손가락 굵기.

아내와 함께 교보에 놀러가는 겸 해서 터치펜을 샀다. 만 3천원인가 하는 보통 모델.



[2012년 3월 13일. 산토리니]

- 처남이 페북에서 팔로우하던 한 화가의 그림을 기억해 그린 그림.

- 터치펜이 있다고 곧장 그림이 술술 나오는 건 아니었다.



[2012년 3월 15일. 다이버]

- 뉴스에서 본 장면이 너무 예뻐서 그려보고 싶었다.

- 배경에 터치를 한 첫번째 작품.


거의 모든 작품이 1시간 20분 정도의 퇴근시간을 이용하여 그려졌는데, 시간이 더 주어진다고 그림을 더 잘 그리게 될 것 같지는 않다. 오히려 짧은 시간 덕택에 이 안에 뭔가를 집중해서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느낌.


터치펜이 손에 들어온 이후는 그림에 사람 모양의 형체를 넣고 있다.

사람이 그림 안에 있으면, 내 감정이나 기분을 이 녀석의 동작이나 표정 등에 투영할 수 있어서 나도 재밌고, 보는 사람도 내가 무슨 생각, 무슨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.



[2012년 3월 24일. 이여업!!]

- 잘은 기억이 안나지만 뭔가 기운나는 일이 있었다. 신나서 그린 그림.



[2012년 8월 2일. 더워요. 잘못했어요.]

- 연구실 워크샵을 마치고 오는 길, 다들 물놀이를 하는 중에 그린 그림.

- 양수리 풍경을 그릴려다가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에 그림 주제를 아예 바꿔버렸다.


조금이나마 마음먹은 대로 그림이 나오니, 주변 사람들에게 뭔가 주고 싶을 때 그림을 사용하게 됐다.



[2012년 3월 29일. 건강바둥]

- 갑상선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한 동생에게.


[2012년 4월 7일. 마녀]

- 마녀가 나오는 동화책이 망가진 아내의 조카에게.


[2012년 4월 18일. 청혼반지]

- 결혼 3주년을 맞은 아내에게.


[2012년 5월 15일. 카네이션]

- 고마운 선생님들에게.


작은 재주지만, 생각과 마음을 전할 방법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.


4월까지는 퇴근과 동시에 핸드폰과 터치펜을 빼들었지만, 

눈이 뻐근해져서 뜨기조차 힘들어진 경험을 몇번 한 뒤로는 요새는 일부러 드문드문 그리고 있다.

일을 할 때마다 혹사당하는게 눈인데 집에 가는 길에라도 좀 쉬라고.


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정리를 했는데,

8월 말일까지 약 반년동안 그린 그림이 41장.




앞으로 더 큰 그림, 더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고, 그래서 이번에 구글이 새로 출시한 Nexus7이 탐난다.

하지만 지금의 퀄리티로 4인치짜리 작은 공간을 채우는 데도 한시간 반이 빠듯한데 7인치, 또는 10인치 화면을 더 높은 퀄리티의 그림들로 채우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할지. 


내 이성의 끈이 아직은 튼튼하게 지름신의 강림을 막고 있다.



더 좋은 그림들을 보고 배워보려고 찾아봤더니, flickr에 스케치북 그룹이 있다. (http://www.flickr.com/groups/sketchbookmobile/)


핸드폰으로 그린 그림들은 못봤고 거의 ipad로 그린 그림들을 올려주시던데, 이 가운데 내 그림도 주목받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져본다.


[2012년 8월 30일. 그래, 또 온다 이거지.]

- 태풍 볼라벤이 지나간 직후 태풍 덴빈이 연달아서 온다는 뉴스를 보고.


살다보면 그림그리기 힘든 날도 많을 거고 다른 일로 바쁜 날도 많겠지만,

내가 가진 몇 안되는 재주 중 하나다.


평생의 취미가 되면 좋겠다.

나중엔 아이들이랑도 같이 그리고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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Posted by Pega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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