1. 10살이 되던 국민학교 4학년 때.
다들 그렇겠지만 의식이라는 것이 제법 사람의 꼴을 갖추었을 때,
내 나이는 한 자리 수였다.
누가 키가 더 큰지 이런 성장이 큰 관심사 중 하나였을 때라,
나이가 두 자리가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. 하는 궁금증을 계속 품고 있었고
사방에서 폭죽이라도 울리려나 싶었지만,
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슥- 지나갔다.
2. 고등학교, 대학교 입학시험을 통과했을 때.
전교 1,2등 하는 학생들도 떨어지는 게 과학고 입학 시험이라,
전교 수십등 하던 내가 과학고 시험을 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
가장 적극적으로 말린 사람은 다름 아닌 담임선생님이셨다.
그 다음으로 적극적으로 말린 사람은 다른 과목 선생님들.
우리 부모님도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기보다는 선생님들이 시험을 못보게 하니
믿음과 소망보다는 오기에 가까운 감정이 눈에 많이 띄였고,
중3때 같은 반 친구들은 돈내기를 했는데 떨어지는 데 건 녀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. (...)
사실 경시반에 들어가기만 했지,
그 안에서는 하위권에 속했던게 솔직한 내 성적이라
선생님의 관심도 다른 친구들에게 쏠려 있었고,
그래서 승부욕따위 없는 내게도 두고보자 하는 마음이 약간은 생겼다.
시험을 봤고,
9명의 우리 학교 출신 응시자 중 3명의 합격자 안에 들었지만,
그래서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기분은 참 좋았지만,
그래서 방안을 뛰어다니며 소리도 질렀지만.
이상하게 그 순간부터 소리를 지르는 입과 달리 머리는 차가워졌다.
아.. 붙었구나.
그렇구나.
3년 뒤 수능을 봤을 때도,
우리 학교에서 그다지 난 공부로 주목받는 학생은 아니었지만,
사상 최악의 난이도였던 당시 수능과 난이도에 관계없이 점수가 일정한 징크스의 행운으로
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합격했을 때, 이 때도 생각보단 덤덤했다.
아.. 붙었구나.
다행이다.
아마 전 해에 카이스트 시험에서 떨어졌던 경험 때문에,
좋다는 생각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 않았을까.
3. 박사학위 발표를 통과했을 때.
이 때는 많이 달랐다.
연구실 회식을 할 때만 해도 웃고 즐기며 축하인사에 고맙다고 껄껄 웃다가 나왔는데,
지금의 아내가 되어있는 당시의 여자친구를 만나서는 뭐가 그렇게 북받쳤는지 엉엉 울었다.
뭐였을까.
그 느낌은.
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.
4. 그리고 오늘.
대학원 과정 내내 교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이 있었다.
젊은 연구자라면 논문 숫자가 나이만큼은 있어야 한다.
지금이야 논문의 양적 질적 인플레가 심해져서 저 말이 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,
온 국민이 월드컵으로 붉은악마가 되었던 2000년대 초반엔 넘사벽으로 들렸다.
7년만에 대학원을 벗어날 때 손에 쥐었던 논문의 갯수는 겨우 초등학교를 입학한 나이.
그리고 오늘. accept된 논문의 author proof를 손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.
올해 논문이 좀 많이 출판된 것 같은데.. 하는 생각.
세어보니 논문이 79년생인 내 나이를 조금 넘었다.
대학원에 들어온지 13년만.
그동안 밀린 논문들이 올해 나와준 덕이 크다.
이 순간을 꽤 많이 상상했는데.
케익이라도 사놓고 조촐한 파티를 해야지 했는데.
어제 아내가 우연히 실수로 사와서 뜬금없이 켰던 초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구나.
이 모든 논문엔 나를 도와준 많은 분들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다.
모두가 내 스승님들. 모두 감사합니다.
덕택에 많이 배웠고, 배우고 있습니다.
회사에 몸담고있는 만큼 이 논문들이 어떻게 쓰일 지는 나도 모르겠다.
좋은 일(...)에 쓰이면 좋겠는데.